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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al Essays

김다슬 개인전 《쿵쾅펑》(BLAM BANG BOOM) 전시 비평

변색된 이미지들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손혜림

“역량계 반응이 보여주듯, 붉은 광선이 우리의 눈에 가해지면 우리는 온몸으로 붉은색을 본다.”1

깨끗함은 필연 삭제와 마비를 전제한다. FPS 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강한 충격을 동반한 타격 이후 나타나는 ‘컨커션 효과’와 그에 뒤따르는 섬광의 잔상을 곧바로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게임 속 스크린은 하얗게 전면화되며, 사운드마저 희뿌옇게 일그러진다. 그 순간 플레이어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음 시나리오를 전개할 선택적 집중력과 비효율로 간주되는 요소들을 부산물처럼 처리해 내는 반사적 민첩성이다. 즉, 지각적으로 어떤 대상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동시에 그 배면에서 인지되지 못한 것들이 떠밀려간 마비의 지대를 망각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올오버 페인팅의 미감조차 차용된 듯한 ‘깨끗한’ 전장의 재현은, 실제 참사의 이미지들과 기묘한 동형성을 공유한다. 이 동형성은 리얼리티의 체감 혹은 정도의 특질에서 기인되는 것이 아니라, ‘압축’의 과정과 결과물로부터 출발한다.

​작가가 직접 명명한 이번 전시 제목 《쿵쾅펑》은 폭발음을 암시하는 세 갈래의 의성어로 이루어져 있다. 전시 주제에 대한 사전적 배경이 없다면 어떤 이는 모종의 운율감마저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 전시명만으로도 세계의 현상에 대한 억지스러운 압축이 어떤 오해와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김다슬은 전쟁과 범죄의 참상이 그 어느 때보다 손쉽게 도달하는 시대에, 오히려 그에 대한 감각이 급속히 마모되는 현상을 소통의 실패로 읽어낸다. 주지하다시피, 수전 손택은 일찍이 이러한 무감각화의 이유로 이미지들의 지나친 적나라함과 반복적 노출로 꼽은 바 있다. 하지만 작금의 문제는 오히려 지나치게 많은 것들이 ‘압축’되는 데에서 비롯되며, 그 파열은 이미지와 언어의 층위에서 동시에 감지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예컨대, 핵폭발 직후의 버섯 ‘구름’이라거나 충돌 이후에 발생하는 파편 ‘구름’을 둘러싼 압축의 과정-결과물을 들어볼 수 있다. 우리가 이러한 이미지들을 떠올릴 때, 이미지의 주축을 이루는 유사 ‘구름’ 뒤편의 존재들을 세밀하게 묘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수사적 장막으로 가려진 ‘-구름’이라는 단어 이면에서 수많은 생명은 비가역적으로 소멸해간다. 폭력을 고발하고자 했던 이미지 생산자의 태도와 의도는 전송의 경로를 이탈하며 점차 변색되어간다. 그렇다면 극단적인 압축이 빚어낸, 필연적으로 변색된 이미지들을 송신 받는 우리는 결국 수동적인 수신자의 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가?

김다슬은 최초의 시작점과 형태적 유사성만이 잔류한 변색된 이미지를 실패의 흔적이자, 압축 과정이 드러난 열화의 증거로 간주한다. 따라서 작가는 전시 공간에서 ‘압축’의 궤적—과정과 결과로서의 작업—을 드러내고, 그 너머에서 대안적 애도와 감각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우선, ‘압축’이 작동하는 일차적 ‘과정’은 입구에서 관객을 맞이하는 반응형 설치물 〈쿵쾅펑!〉 (2025)으로 가늠해 볼 수 있다. 자칫하면 지나칠 수 있는 이 작업은, 관객의 움직임에 반응해 정제된 폭격음을 실시간으로 재생하며 강제적으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어떠한 인터벌 없이 반복 송출되는 폭력의 사운드는 인간-비인간 주체의 고통이나 잔류하는 노이즈마저 지워져있다. 관객의 몸짓에 즉각 반응하는 화려한 색감의 네거티브 영상과 함께 재생되는 ‘깨끗한’ 폭격음은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주의(attention)를 포획당하고 현실을 지각하게 되는지를 일깨우는 단초로 작동한다. 조너선 크레리는 근대라는 조건 속에서 인간의 ‘주의’가 재정의되는 양상을 단순한 인지 문제가 아닌 근대성 그 자체의 산물로 분석했 다. 그는 주의를 고정된 권력 장치가 아닌,2 다양한 조건들이 절합되며 권력의 효과가 순환하는 공간적 장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반응형 설치 〈쿵쾅펑!〉은 전쟁과 범죄의 현전이 미디어를 통해 재현되는 방식 자체가 관음증적 감각 구조를 은연 중에 강화하는 환경임을 드러낸다. 관객은 의도에서 벗어난 행위를 하더라도 결코 위협받지 않으며, 이는 이 공간이 관음과 안전이 병존하는 비감응의 장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방증한다.

무차별적 폭격음을 지나 마주하게 되는 전시장은, 전쟁과 범죄를 중계하던 미디어 이미지들이 흘러들어와 감각의 실패로 얼룩진 채 도착한 풍경 그 자체로 읽힌다. 압축을 거듭하다 못해 일그러져 화면을 떠도는 〈쿵쾅펑!〉(2025)의 리얼타임 녹화본은 전시장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며 정체불명의 형상으로 반복된다. 섬광을 상징하는 이미지와 도식화된 텍스트는 한 화면 안에서 포개지며 엉겨 붙는다. 〈쿵쾅펑!〉을 축으로, 오른편에 전시된 작품들은 기사에서 추출된 탈맥락화된 문장들이 변형되어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흐린 글자들〉(2025)과 〈실패하는 언어〉시리즈(2025)는 압축의 결과로 드러난 오늘의 현실과 교차된다. 이 작업들은 작가가 지속적으로 수집해온 200여 편의 전쟁 및 범죄 관련 기사들을 선별 후 크리에이티브 코딩 과정을 거쳐 생성된 결과물이다. ‘-글자들’, ‘-언어’처럼 텍스트 기반임을 드러내는 작품명과는 달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선들이 드로잉처럼 캔버스를 메우고 있는 듯하다. 원문 텍스트가 명시된 캡션을 확인하기 전까지, 이 작업들은 본래의 의미가 휘발된 채 변색된 이미지들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실패하는 언어〉 시리즈 옆에는 QR 코드를 통해 접속 가능한 참여형 버전 〈실패하는 언어〉(2025)가 나란히 설치되어 있다. 관객은 링크에 접속해 직접 텍스트를 생성하는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생산자마저 식별할 수 없는 뭉그러진 언어 혹은 이미지들을 즉각적으로 수신하게 된다. 타이핑의 리듬과 유사한 속도권에 놓인 결과물은 그 과정을 거쳐야 마땅한 시간적 거리감을 무색하게 할 만큼 신속하게 도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행 중인 운동성을 내포하는 듯한 작품명 〈실패하는 언어〉는 결국 실패한 언어임이 분명함에도 ‘실패한 언어’라 불리지 않는다. 실패의 과정을 해부하고 지각할 수 있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일그러진 형상들을 향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이때의 과정은 더 이상 압축되지 않고 되감기며 새로운 서사를 구성하기 시작한다. 〈실패하는 언어〉는 바로 그 개입의 순간, 실패하지 않는 언어로 재맥락화된다.

폴 비릴리오는 그의 저작 『속도와 정치』에서 정보 전달의 가속화가 지각의 왜곡과 무감각을 조장한다고 말하며 정지가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검은 섬광과 밝은 그림자〉(2025)3 는 〈실패하는 언어〉가 암시했던 ‘진정한 실패’의 본질을 속도의 맥락 속에서 시각적으로 가시화한 연작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불균질한 백색 섬광들은 너무도 빠른 속도로 재생되어, 사고의 지대에 진입하기도 전에 그 과정을 생략한 상태로 화면을 부유한다. 이 속도감은 애초 섬광이 어떤 형상과 색채를 지녔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내용과 배경을 실시간으로 전복시킨다. 앞서 언급한 게임 속 섬광 효과처럼 플레이어가 하얀 빛에 사로잡혀 죽음의 그림자를 감지하지 못하는 순간, 섬광과 그림자는 서로의 동의어가 된다. 작가의 작업은 이렇듯 과정과 결말이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이 둘을 본래의 궤도로 지연시키고 그 극단적 시나리오들을 병치함으로써, 과정이 곧 결말로 수렴하는 속도가 결국 아무런 정보를 전달하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이는 근대 이후 빠른 속도를 미덕으로 여겨온 ‘질주학’이 남긴 비극적 유산이자 그것을 되비추는 냉소적 농담처럼 보인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디지털 환경에서 ‘부피’를 생명력과 에너지 가능성의 테제로 제시한다.4 디지털의 이진법을 넘어 인간의 인지 속에서 ‘부피’로 팽창하는 에너지를 인정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일종의 ‘생명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생명체는 무엇보다 그것의 기운을 방출하는 차원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5 이번 전시에 출품된 〈검은 섬광〉시리즈(2025)와 〈펼쳐진 풍경, 일렁이는 시야〉(2025)는 디지털 기반의 작업을 이어온 작가가 아날로그적 감각을 병치하며, 이미지에 물질적 부피감을 구현한 전환점적 시도로 읽힌다. 〈검은 섬광〉 시리즈는 보도 이미지, 납작하게 압축된 폭발의 흔적을 데이터 작업을 거쳐 물질로 다시 호출한 작업이다. 실제 섬광이 불러일으킬 압도적인 크기감에 비해, 잔해처럼 보이는 이 조각들은 오히려 멀리서부터 부단히 굴러온 현장의 증거로 작동하며 그 사건의 실감을 더욱 생생히 전달한다. 더불어 입체 조각으로 구현된 섬광 주변에는 그 일부 단면만을 도려낸 평면적 섬광 형상이 리넨 위에 재현되어 있다. 이는 디지털 차원의 즉각성과는 대비되는 지난한 수작업의 시간을 고스란히 수반한다. 〈펼쳐진 풍경, 일렁이는 시야〉 역시 리넨 위에 구현된 설치 작업으로 디지털로 제작된 다른 작품들과 달리 매우 느린 시간 안에서 전개되며 관객의 지각에 천천히 안착한다. 폴 비릴리오가 가속에 따른 지각의 왜곡을 경고했지만, 다시 우리 앞에 펼쳐진 이 (왜곡된) 일렁이는 시야는 시간을 마음껏 늦출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으로 자리한다. 〈검은 섬광〉조각들과 〈펼쳐진 풍경, 일렁이는 시야〉를 폭력의 잔해이자 구체적 은유로 읽어낸다면, 그것은 폐기된 생명들의 흔적이자 특정한 미디어 이미지에 기대지 않고도 애도의 서사를 전개할 수 있는 새로운 도약점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과정을 온전히 거치지 않은 채 미래에 도착해버리는 속도의 압축은 조너선 크레리가 지적한 ‘지각의 정지’를 넘어 ‘사고의 정지’를 초래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우리가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무력감과 사고의 탈진이야말로, 현재의 질주학이 도달하려는 궁극의 지점일 수 있음을 환기시킨다. 김다슬은 변색된 이미지를 복원하거나 완전한 원본으로 되돌리는 대신, 실패의 결과와 그 과정을 차분히 길어 올리고 그 안에 개입함으로써 공동의 책임감과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훼손된 이미지를 되살리기 보다 이미 당도한 이미지의 파편 속에 떠밀려온 폭력의 흔적을 정면으로 수용할 때, “변색된 이미지들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비로소 조심스럽게 발화된다. 그 질문의 여백 속에서, 김다슬이 이번 전시에서 실험한 또 다른 ‘태동의 가능성’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1 Charles Féré, Sensation et mouvement, F. Alcan, 1900, 152.

2 조너선 크레리, 『지각의 정지 – 주의·스펙터클·근대문화』, 유운성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3.

3 폴 비릴리오, 『속도의 정치: 공간의 정치학에서 시간의 정치학으로』, 이재원 옮김, 그린비, 2004.

4 김다슬 작가 노트에서 발췌, https://www.dasulkim.com/statement

5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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